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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제자도 칼럼

온전한 성화

by 황정현 2015. 12. 12.

개혁신학의 성화론은 우리에게 주어진 찬란한 신학유산이다. 이를 단지 내면적 성화를 다룬 편협한 담론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성화론이 왜곡된 우선적 이유는 한국교회의 모습 때문이다. 개인성화가 마치 사회와 무관하게 동동 떠다니는 진공상태에서의 의로움인듯한 인상을 준다. 전적으로 무지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개혁주의를 말하는 스스로가 그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과거 신학교재로 애용되었던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안토니 후크마는 개인적 성화를 넘어 성화의 사회성을 말한다. 후크마는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에 대해, 충분히 참고하고 모색할만한 건강한 논의라 한다. 해방신학에 대한 한국교회의 알러지적 반응은 개혁신학에서 기인한다기 보다, 국내 정세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스스로가 이를 혼동한다.

성경은 철저히 이웃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다. 만일 어떤 신학이 성경이 강조하는 이 부분을 도외시 한다면 그건 다른 신학이 아니라, 틀린 신학이다. 개혁신학은 틀린 신학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을 수용한다는 이들이 틀렸다. 그들이 이해했노라 배설하는 내용은 그것이 아니다. 개혁신학은 이웃사랑을 부정하지 않는다. 제멋대로 그것을 들여와 불편한 부분을 거세했기 때문에 기형적 신학과 신앙이 태어났다.

성화론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부인self-denying'의 정신에서 비롯된다. 자기부인은 맹목적이지 않다. 자기부인은 이웃사랑을 목적한다. 이웃사랑은 자기부인을 전제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건 이웃을 부정하는 일이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자아를 부정해야 한다. 예수는 자기부인을 말과 삶으로 가르치셨다.

칼빈과 존 오웬은 죄죽임mortification을 말한다. 개혁주의 구원론의 틀은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이다. 예수와 연합한 신자는 예수의 영을 지닌다. 창조된 예수의 영은 옛 자아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는데,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죄죽임의 교리이다.

역으로 정리하면, 이웃을 사랑하자니 나를 지나치게 애정해서 이웃의 고통을 부정하게 된다. 따라서, 죄죽임을 통해 옛 자아를 죽이는 자기부인이 요청된다.

개혁주의 구원론 가운데, 구원서정ordo salutis은 인간 내면에 관한 해부학이다. 예수께서 성취하신 구원을 성령께서 신자에게 적용하실때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을 띠는가에 대한 심층적 리포트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맹목적이지 않다. 궁극적인 이웃사랑의 하나님나라를 지향한다. 개인의 변화는 곧 이웃과 사회 변화를 야기한다. 죄죽임mortification과 성화sanctification. 죄죽임은 개인성화를 넘어 사회성화를 전망해야 한다. 그것을 조명하는 것이 보수신학에 얽혀있는 이들의 당위요, 책무다.

​황정현목사(제자도연구소)
hwang@gooddisciples.org


사진 출처_송주현전도사 페이스북. 부산역에서 노숙인을 만나는 송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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