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는 스스로 준거와 준칙으로 삼는 것에 반(反)하여 신앙을 구성해왔다는거다. 이는 성경까지 가지 않더라도 한국 대부분의 보수교회에 익숙한 칼빈과 그의 저서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특히 우리교단에서 칼빈은 교주인지, 신앙의 대상인지 싶을 정도로 점유율이 높다. 신대원을 다니며 3년 내내 들어온 이름이고, 당시 칼빈탄생 500주년이 있던 시기라 얼마나 많은 관련 행사와 이벤트들이 있었던지. 교수요원이 되려면 칼빈을 전공하거나 논문을 써서라도 어필해야 그 좁은 신학교수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고, 그걸 인지한 학생들은 걸핏하면 칼빈을 언급하기 일쑤였다.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제 분야가 무엇이건 어디라도 칼빈을 끌어들인다. 이런 환경에서 학문을 하니 관련 자료가 쌓이고, 지금 연구소에도 직접적인 칼빈 관련 서적만 백 권은 되지 않을까 한다.
한국교회에서 칼빈은 양가감정이 드는 인물일테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앞선 모습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너무 많이 들으니 괜히 반감이 생기고 싫어지는 그런 것 말이다. 그리고, 그보다 큰 이유는 칼빈을 내세우는 한국교회 모습이 건강치 않으니 당연히 그들이 신봉하는 내용도 그럴 것이라 짐작되는 것이겠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인물이나 사상이 없듯이 칼빈 또한 그럴텐데, 코스웍을 마치고 내용을 조금 살피니 '칼빈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 한국교회는 시장자본주의에 충실한 프레임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외형을 키워왔는데 정말 그 기원이 스스로 믿는 바에서 비롯됐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 성경은 물론이거니와 칼빈도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한마디로 인지부조화의 전형이다.
성경도 칼빈도 인문주의(humanism)적으로 볼 수 있을텐데, 스스로 근거삼는 내용이 스스로의 외형과 다르니 말은 그렇다 하지만, 정작 그 내용을 깊이 살피고 가르칠 수 없다. 필연 경박해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결국 시장자본주의적인 방법론으로 그렇게 시류를 따라 흐를 수 밖에 없는데, 여기서 또 의문은 시장과 자본은 늘 자기 모습을 바꾸며 변화하기에 그렇게 구태의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도대체 뭘 따라가고 뭘 추구하는건지. 의문의 패배다.
그 중 하나를 짚어보면, 기독교강요 초판(1536) 1장 십계명 해설부분을 보면 칼빈은 인간의 자기애의 죄성을 지적하며 그런걸 지지하는 율법은 없다 단정하고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설파한다. 사실 입버릇처럼 칼빈을 말하듯 이런 내용을 읽고 말했다면, 기복이며, 성공주의-성장주의며, 집단이기주의적인 모습으로 지금처럼 비판받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성경을 경전으로, 칼빈을 그 해석의 모범으로 삼는다면 그 내용을 좀 더 주의깊게 살피고 수용하면 좋으련만.
분명 사람들은 태어남으로부터 그러하듯이 모두 자기애의 경향을 가진 채로 보내졌으므로 자신들의 뜻대로 이 사랑을 더욱 과도하게 태울 필요가 어떤 율법에도 없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임이 극히 명백하므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적게 살고 적게 열심을 내는 사람이 가장 거룩하게 최선을 다하여서 사는 것이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고 열심을 내며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유하고 구하는 사람보다 더 나쁘고 악한 사람은 실로 아무도 없다."
Inst. 1. 24., 문병호 역(라틴어직역 기독교강요, 생명의말씀사, 94-95.)
황정현 목사
제자도연구소 대표
'게시판 > 제자도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시대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까? (31) | 2022.11.11 |
---|---|
큐티식 성경읽기의 오류 (1) | 2022.11.09 |
오피스 처치, 교회와 공간의 가능성 (0) | 2022.11.08 |
두 권의 노트 (0) | 2022.08.22 |
성경, 위대하지 않은 이야기 (0) | 2022.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