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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제자도 칼럼

신앙의 인문사회성

by 황정현 2015. 7. 11.


신앙을 개인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게 없습니다.

일단 나 하나만 봐도 그렇습니다. 한주의 생활 속에서 어디서,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고 삽니까. 예배당에 모이는 사람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곳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영향을 사회로부터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은 사회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나요. 교인들끼리 산속에서 움막짓고 사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내 생각, 행동양식, 가치관등이 기실 가정, 일터, 미디어, 정치, 경제 등의 영향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신앙관 또한 응당 그 영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봅시다. 목회자에게 듣는 설교. 그 설교자는 하나님과 단둘이 거처하나요. 그도 주변환경의 영향에 놓인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가 읽는 성경, 성경읽기와 해석 또한 전혀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할 수 없겠죠. 게다가 성도는 설교자의 영향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 상호간 또는 가족 중에 신앙을 지닌 이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영향을 받게 되죠.

생각보다 많은 경우, 사회에 대한 이해가 나 자신과 내 신앙의 모습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을 경험합니다. 80년대생 젊은이들과 한동안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수년간 신앙 생활을 해왔던 친구들이지만, 차근차근 성경과 복음의 기초부터 다시 살펴나갔습니다. 이해도 잘 하고, 잘 받아들이는 것 같았는데, 어느 지점에선가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었습니다. 다른 세대와 크게 편차가 느껴질 정도로,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이 당혹스러웠습니다. 다방면으로 생각도 하고, 성경도 묵상하며 답을 찾아보았지만 어려웠습니다.

그때, 의외의 답을 얻은 것이 사회과학 서적을 통해서입니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트라우마 한국사회'(서해문집)에서 80년대생을 '공포세대'라 지칭하며 그들이 자라온 배경을 사회과학적 앵글로 조망합니다. 전 그 부분에서 모든 의문이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참고. '청년직장인(80년대생)에게 교회는 무엇을 전할 것인가? http://gooddisciples.org/m/post/34-이들이 어려서부터 받아온 환경(한국사회, 세계정세, 부모의 영향, 한국교회의 풍토)의 영향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확인하고 나니 비로소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이들에게 필요한 신앙적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해졌습니다.

네. 물론 우리에게 성경 이상의 텍스트는 없습니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조차 '시대의 산물'(?)이라는 역설을 아십니까? 성경 전체에서 시대적 배경이 없이 진공상태로 기록된 책은 없습니다. 저자가 있고, 그 저자가 염두에 둔 독자가 있습니다. 기록 방식은 당시의 언어와 문학기법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보다 더 깊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선 배경과 문학적 장치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한국에서 종교개혁자 칼빈의 위상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가 신학을 공부하기에 앞서 인문학적 소양을 준비했다는 것을 염두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 합니다. 개신교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기독교강요라는 책이 산속에서 성경읽기와 기도의 과정 중에 쓰여졌을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억측도 그런 억측이 없습니다. 칼빈을 세상에 알린 것은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으로 인문학 저술이었습니다. 칼빈에게 성경과 신앙에 대한 통찰을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인문학적 토대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더 많은 얘기를 하고, 더 강조할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한국교회가 이 부분을 터부시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인정도, 수용도 심지어 이해는 하고 있는가 싶은 마음까지 듭니다. 다른 이가 수긍할 수 없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어쩌면 신앙을 가장한 나의 아집과 강변일 수 있습니다. 어떤 종교든, 어떤 신앙이든 그 자체의 논리와 개연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책의 형태로 신의 계시가 주어졌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라면 필히 '사유'라는 과정을 벗어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럴 수록 더 밝혀지는 것은 우리의 왜곡되고 피상적인 초라한 신앙입니다. 감추고 가린다고 될게 아닙니다. 우기고, 단속해서 될 것도 아닙니다. 곪은 것은 째고 짜내야 합니다. 그냥 두면 썩고, 냄새나고, 결국 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지금이라도 함께 만나고, 얘기하고, 생각하고, 고민한다면 반드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니었어도, 지금부터 다르면 됩니다. 부디 우리 모두 근본으로(Ad Fontes)으로 돌아가는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황정현목사(제자도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