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의 한국교회는 교회성장론에 함몰돼 성장지상주의를 추구했다. 하지만, 상당부분 경제성장과 맞물려 진행되었던 그것은 경제성장이 꺾임과 동시에 정체되었다. 게다가 사회가 다원화되고 입체화 됨에 따라 기독교의 목표를 매우 단순화 해 고도성장을 추구하는 목회형태는 더이상 지지받기 어려워졌다. 동시에 그렇게 초고도 성장을 추구한 한국교회의 폐해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며 사회의 지지를 얻기도 어려운 형국이 되었다.
그렇게 한국교회는 성장을 멈추고, 나아가 마이너스 성장시대에 들어서며 그간에 사용해오던 구호와 방법론 프로그램들이 무용해지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황 인식을 하지 못한 대다수의 교회는 여전히 교회 내부적으로는 예배당건축과 교회성장을, 외부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출세하라는 고지론을 주요 메시지로 양산해 왔다.
이것이 더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COVID-19 이다. 코로나 시대가 장기화되며 교회의 대면 집회가 축소 내지는 전면 폐지되었고 이는 그간에 추구해오던 방향성과 관성에 대한 심각하고 진지한 인식의 타격을 주었다. 오프라인에서 하던 관성대로 온라인에서 설교와 집회동영상 조회수를 높이는 것으로 의미를 찾는다는 웃픈 얘기도 들었는데 과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Ad Fontes. 종교개혁에서 외쳐진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이 시점에 다시 상기되기를 바란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교회에게 더이상 외형적 성장의 추구가 아닌 다른 것을 고민하라는 역사와 시대적인 메시지로 여겨야하지 않을까.
기독교라는 종교의 본질이요 핵심은 신의 계시다. 우리가 성경이라 부르는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이 없다면 기독교도 없고 교회도 없다. 상당수 장로교 전통 위에 놓인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를 자기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한다는 신념을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러한가. 앞서 진술한 교회성장주의 시대, 과거 한국교회는 성경을 교회와 기독교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인식해 목회 전반에 반영했는가. 그렇다 할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만 들어가보면 제목을 그럴지 몰라도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걸 인정할거라 본다.
모든 집회시간마다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진술한다고 그게 성경적일까. 성경학교, 성경공부, 성경통독...수 많은 성경을 제목으로 하는 많은 프로그램을 양산했지만, 과연 그 프로그램의 궁극의 목적이 성경이었을까 아니면 교회성장을 위한 표면적 장치들이었을까 묻는다면. 굳이 답하지 않더라도 사실 그간의 한국교회 모습이 이를 반영한다. 그토록 신의 계시에 철저했다면 과연 지금 한국교회가 윤리적으로 이런 모습일 수 있었을까. 사회적으로 이렇게 지탄과 외면을 받게 됐을까.
성경은 책이다. 기독교는 책과 글을 신의 계시로 수용하는 교리체계를 지닌다. 그렇다면 이는 자연스레 책과 글을 중요하는 집단의 성격을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무엇인가. 책을 중심으로 학습하고 사고하는 것. 각자 글을 읽고 사고하고, 함께 생각을 나누고 토론하고 비판하며 책에 담긴 사상과 그 책을 쓴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선되며 나아가 다음으로는 그 책의 세계관을 반영해 그것을 자신의 삶과 사회에 적용해 나가는 것이다. 이 모습이 숙의熟議의 형태며 책을 계시로 수용하는 종교의 응당의 모습이겠다.
그렇다면 두가지다. 먼저는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다. 그동안 형식적이고, 교회운영의 수단과 프로그램으로 성경을 전면에 내세웠던 것과 달리 사도행전 베뢰아의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나 성경을 상고하'(행17:11)는 전환이 필요하다. 쉽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글쎄. 어쩌면 우리는 많은걸 버려야 할런지도 모른다. 그동안 우리의 성경읽기는 신학적 목회적으로 답을 이미 정해놓고 성경에 그런 해석과 적용을 우겨넣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성경에 대한 태도의 전환은 우리의 생각과 실천에 많은 도전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는 준비 되었는가. 신의 계시 앞에 우리를 바꿀 준비가.
다음은 함께 읽기다. 종교개혁의 의미는 성직자들의 전유물이던 신의 계시를 평신도들의 손에 전해준 것이다. 이미 종교개혁은 500주년을 넘어 지나고 있다. 그동안 그 의미는 얼마나 반영됐을까. 물론 성경을 누구나 읽고 소유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누구나 자유롭게 읽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지는. 특정 신학자와 목회자의 해석에 갇힌 채 그 이상의 신학적, 사회적, 목회적, 예언자적(월터 브루그만) 상상력을 갖는건 한국교회에서 여전히 '위험한' 일이다. 쉬운 예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 모든 성경Tota Scriptura을 말하지만, 성경의 제일 마지막 책의 경우 칼빈도 주석을 쓰지 않았다는 상투적 이유로 잘 읽히지도 설교되지도 않는다.
신의 계시는 누구의 것인가. 신학자의 것인가, 목회자의 것인가. 이는 인류 모든 이에게 주어진 것이다. 누구나 읽고 접근하도록 전세계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고, 대부분의 인류가 자국의 언어로 읽고 이해하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도록 쓰여진 책이 바로 신의 계시, 성경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더이상 특정 신학과 사회, 문화 만을 반영한 형태가 아니라 조금 더 자유롭고 다양한 신학적 배경, 사회, 문화적 입장에서도 신의 계시를 읽고 생각하고 논의할 수 있어야 하겠다.
앞서 교회성장주의를 지적했지만, 교회성장은 부정할 수 없는 종교적 과제다. 물론 그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앞선 시대 기독교는 한국사회에 여러 모습으로 소개되고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제 과거 그 모습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는 실정이고. 해답은 오히려 늘 쉽고 간단하다. 이 종교가 시작된, 기독교가 시작되고 교회가 시작된 궁극,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혹시 우리의 아집으로, 우리의 이익을 위해 자유로운 성경읽기를 묶어두었다면 이제 그 빗장을 열고 누구나, 그리고 모두가 함께 읽고 얘기나눌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 떳떳하다면, 신의 계시가 자랑스럽다면 감출 이유가 없다. 어떤 인문고전보다 깊고 풍요롭고 인류에 유익하다면 이를 뒷전으로 미루고 다른 많은 걸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숙의 기독교. 각론으로 들어가면 여러 논의와 변화가 뒤따라야 할테다. 성경해석의 독점적 형태와 프로그램으로서의 표면적 성경다루기 뿐만 아니라, 목회자 후보생을 양산하는 과정, 그들의 교육 훈련의 전반, 교회 플랫폼 구조, 모임과 집회의 형태와 내용, 사회문화적인 다양성에 대한 수용의 여부까지. 하지만, 우리가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봐야할건 원래 교회는, 기독교는 그런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바울의 전도여행은 그 과정을 잘 보여준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행 19:8-10)
교회와 기독교가 형성된 과정 자체가 타문화권 속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논의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생애 전 과정 동안 그 일을 계속 했고,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몸 담고 경험하고 있는 교회와 기독교다. 흔히 교회행전이라는 복음의 확장과 교회의 형성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역시 사도 바울의 한결같은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행 28:31)
사도행전의 기록이 과거 지나간 교회의 역사로만 아니라,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읽고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로 여긴다면 바울이 복음을 그렇게 다뤘듯 우리도 성경 자체를 보다 진지하게 대하고 숙의熟議하는 것으로 교회사의 새국면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황정현목사
(제자도연구소장, 도시공동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