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함>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자칫 잘못 다루면 신학적으로 오류에 빠질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분까지는 말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 구원론에 있어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이해는 함량미달이거나 왜곡되어 있습니다. 김세윤 교수께서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에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현 한국교회의 구원에 대한 이해는 '구원파'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여겨질 정도입니다.
이러한 오류의 핵심에는 '믿음'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이해가 기반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대하여 말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행함과 관련하여 야고보서의 말씀과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96-430)의 <자유의지론>의 언급을 나누고자 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4)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약 2:19)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에 관한 말씀들을 잘못 이해하여 '행위구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이는 믿음의 속성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즉,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 말하면서 그 믿음에 상응하는 행함이 없을 때 그것을 정말 '믿음'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자유의지론 2부 18장에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진술합니다.
제 18장 선행이 없는 믿음은 구원에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롬 3:28)라고 하신 사도의 말씀을, 사람은 선을 행하지 않고 악하게 살아도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사도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라고 말씀하신 후, 곧 이어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고 말씀하신 사람, 즉 '택한 그릇'에게는 도저히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런 사람의 믿음은 더러운 귀신들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불과하다. 사도 야고보께서는 '귀신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고 말씀하셨다. 귀신들에게는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믿음이 없다. 사랑으로 의롭게 살아가는 믿음이라야, 하나님께서 그 믿음에 대해 영생이라는 상을 주신다."
우리는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익숙합니다. 교회를 일정기간 다닌 사람은 이 질문에 어렵지 않게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 대답의 근거까지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 답변은 내면의 확신이 없이 학습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자신에게 실재하는 '믿음'에서 비롯된 답변과 확신이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오가며 믿음의 실체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것은 행함을 통해 믿음의 진위를 판가름 할 수 있으며, '사랑으로 의롭게 살.아.가.는. 믿음'만이 영생에 이른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미 믿음을 소유하였으니, 그에 상응하는 행함을 열심히 수행하고자하는 노력일까요. 오히려 반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먼저 야고보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참'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만일 그것이 '참'으로 판명되었다면 비록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 믿음에 상응하는 열매가 반드시 맺힐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을 경우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만일 '실체가 없는 그것'이라면, 이제부터 우리의 관심과 노력은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모아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중세시대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그만큼 교회의 세속화가 가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무엇인가?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자칫 잘못 다루면 신학적으로 오류에 빠질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분까지는 말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 구원론에 있어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이해는 함량미달이거나 왜곡되어 있습니다. 김세윤 교수께서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에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현 한국교회의 구원에 대한 이해는 '구원파'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여겨질 정도입니다.
이러한 오류의 핵심에는 '믿음'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이해가 기반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대하여 말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행함과 관련하여 야고보서의 말씀과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96-430)의 <자유의지론>의 언급을 나누고자 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4)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약 2:19)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에 관한 말씀들을 잘못 이해하여 '행위구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이는 믿음의 속성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즉,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 말하면서 그 믿음에 상응하는 행함이 없을 때 그것을 정말 '믿음'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자유의지론 2부 18장에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진술합니다.
제 18장 선행이 없는 믿음은 구원에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롬 3:28)라고 하신 사도의 말씀을, 사람은 선을 행하지 않고 악하게 살아도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사도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라고 말씀하신 후, 곧 이어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고 말씀하신 사람, 즉 '택한 그릇'에게는 도저히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런 사람의 믿음은 더러운 귀신들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불과하다. 사도 야고보께서는 '귀신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고 말씀하셨다. 귀신들에게는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 믿음이 없다. 사랑으로 의롭게 살아가는 믿음이라야, 하나님께서 그 믿음에 대해 영생이라는 상을 주신다."
우리는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익숙합니다. 교회를 일정기간 다닌 사람은 이 질문에 어렵지 않게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 대답의 근거까지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 답변은 내면의 확신이 없이 학습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자신에게 실재하는 '믿음'에서 비롯된 답변과 확신이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오가며 믿음의 실체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것은 행함을 통해 믿음의 진위를 판가름 할 수 있으며, '사랑으로 의롭게 살.아.가.는. 믿음'만이 영생에 이른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미 믿음을 소유하였으니, 그에 상응하는 행함을 열심히 수행하고자하는 노력일까요. 오히려 반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먼저 야고보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참'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만일 그것이 '참'으로 판명되었다면 비록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 믿음에 상응하는 열매가 반드시 맺힐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을 경우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만일 '실체가 없는 그것'이라면, 이제부터 우리의 관심과 노력은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모아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중세시대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그만큼 교회의 세속화가 가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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