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을 기준으로 80년대생은 25세(90년)에서 35세(81년)가 되었다. 군필 남자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다.
교회에서 이들의 정황은 대학부도 장년부도 아닌 소위 '낀 세대'이다. 아직 결혼을 안 한 미혼도 그렇고, 이제 결혼을 한 신혼부부나, 어린 자녀를 둔 부부 역시 어느쪽에도 소속되기 어려운 정황이다. 청년부에 남아있는 경우는 주로 대학생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뒷 방 늙은이 마냥 부서 운영에 녹아들기 어렵다. 담당교역자의 돌봄에 있어서도 사각지대이기 십상이다. 대부분 사회경험이 없는 청년부 교역자는 직장인의 삶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돌봄과 상담의 한계가 있다. 대학시절 하얗게 자신을 소진해서 부서를 위해 일해온 청년의 경우 당혹감은 더욱 크다.
한때 교회에 헌신했던 이들이 교회 주변을 겉돌게 되는 이유는 비단 돌봄의 부재 때문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지금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교회가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80년대생의 대부분은 이제 사회인이다. 대학시절, 진로와 인간관계, 개인적 문제로 고민하던 시기를 지나 지금은 한국사회의 구조와 현실의 문제를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미생'이 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삶에 관심이 없다. 그토록 빡세게 받아온 제자훈련도 사회에서는 무용지물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내 믿음과 내가 하는 일은 무슨상관이 있을까?' 이게 이들의 속마음이다.
김태형은 <트라우마 한국사회>(서해문집)에서 이들을 "공포세대"라 칭한다(저자는 50년대생 좌절세대, 60년대생 민주화세대, 70년대생 세계화세대, 80년대생 공포세대로 분류한다). 공포세대는 어려서부터 생존경쟁에 내몰린 세대이다. 학교와 학원, 과외를 병행해 왔고, 세계를 무대로 경쟁해야한다는 주문을 받아왔다. 중학교 시절부터 외고, 특목고 등의 입시경쟁을 치렀으며, 대학도 취업도 이들에겐 미래에 대한 희망이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특히 이들은 청소년 시기에 IMF를 겪으며 부모의 고통에 고스란히 동참해야 했다. 전쟁 후 절대빈곤을 경험했던 이들의 부모 "좌절세대"는 자녀들에게 무한경쟁을 통한 생존을 주문했다.
개인적으로 이 세대의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직장인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고 경험했다. 느낀 바는 어느 세대보다 지식도, 능력도 많은 세대라는 것이다. 이중언어는 기본이고, 해외여행 및 유학의 경험, 시대적-사회적-세계적 감각등이 이들에게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한경쟁 속에서 자라왔기에 어느새 많은 것을 갖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에게서 본 것은 '공포'와 '무력감'이다. 이들의 현재 모습은 꿈과 비전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단 '생존과 안전에 대한 몸부림'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일 터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선 자신의 삶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들은 설명을 듣지 못한 세대이다. 왜 해야하는지에 대해 듣지 못하고 경쟁적으로 지내오다보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알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을 설명해주어야 한다. 정죄 없이, 가감 없이, 한계 없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해주어야 한다. 정답이 아니어도 좋다. 어떻게 설명할까? 붙들어놓고 일방적으로 하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이든 묻도록, 무엇이든 말하도록 시간과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다음으로 보다 본질적이고, 근본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과 안전의 공포로부터의 자유함'이다. 이들에게 '사랑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 그 동기는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그 존재는 인간과 세상을 피조한 조물주라는 것. 이들에게 '복음'을 들려주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사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자란 세대일 수 있다. 이들의 주일학교 시절은 교회의 세속화로 인해 성경과 교리, 구원에 대한 내용 보다는 흥미위주의 프로그램과 교회성장과 연동된 전도행사가 주를 이뤘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은 언제든지 뒤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실제로 대학시절까지 열심히 청년부 활동을 한 이들에게서 복음의 부재를 확인한 경험이 적지 않다. 사실 복음은 어떤 세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겠으나,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헌신과 제자도의 당위성 보다는 생존이 아닌 보다 숭고한 가치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가슴 따뜻하고 생애적인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것을 경험케 해주는 것이 기성 세대의 책임이며, 속죄일 것이다.
황정현목사(제자도연구소)
교회에서 이들의 정황은 대학부도 장년부도 아닌 소위 '낀 세대'이다. 아직 결혼을 안 한 미혼도 그렇고, 이제 결혼을 한 신혼부부나, 어린 자녀를 둔 부부 역시 어느쪽에도 소속되기 어려운 정황이다. 청년부에 남아있는 경우는 주로 대학생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뒷 방 늙은이 마냥 부서 운영에 녹아들기 어렵다. 담당교역자의 돌봄에 있어서도 사각지대이기 십상이다. 대부분 사회경험이 없는 청년부 교역자는 직장인의 삶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돌봄과 상담의 한계가 있다. 대학시절 하얗게 자신을 소진해서 부서를 위해 일해온 청년의 경우 당혹감은 더욱 크다.
한때 교회에 헌신했던 이들이 교회 주변을 겉돌게 되는 이유는 비단 돌봄의 부재 때문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지금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교회가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80년대생의 대부분은 이제 사회인이다. 대학시절, 진로와 인간관계, 개인적 문제로 고민하던 시기를 지나 지금은 한국사회의 구조와 현실의 문제를 온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미생'이 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삶에 관심이 없다. 그토록 빡세게 받아온 제자훈련도 사회에서는 무용지물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내 믿음과 내가 하는 일은 무슨상관이 있을까?' 이게 이들의 속마음이다.
김태형은 <트라우마 한국사회>(서해문집)에서 이들을 "공포세대"라 칭한다(저자는 50년대생 좌절세대, 60년대생 민주화세대, 70년대생 세계화세대, 80년대생 공포세대로 분류한다). 공포세대는 어려서부터 생존경쟁에 내몰린 세대이다. 학교와 학원, 과외를 병행해 왔고, 세계를 무대로 경쟁해야한다는 주문을 받아왔다. 중학교 시절부터 외고, 특목고 등의 입시경쟁을 치렀으며, 대학도 취업도 이들에겐 미래에 대한 희망이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특히 이들은 청소년 시기에 IMF를 겪으며 부모의 고통에 고스란히 동참해야 했다. 전쟁 후 절대빈곤을 경험했던 이들의 부모 "좌절세대"는 자녀들에게 무한경쟁을 통한 생존을 주문했다.
개인적으로 이 세대의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직장인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고 경험했다. 느낀 바는 어느 세대보다 지식도, 능력도 많은 세대라는 것이다. 이중언어는 기본이고, 해외여행 및 유학의 경험, 시대적-사회적-세계적 감각등이 이들에게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한경쟁 속에서 자라왔기에 어느새 많은 것을 갖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에게서 본 것은 '공포'와 '무력감'이다. 이들의 현재 모습은 꿈과 비전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단 '생존과 안전에 대한 몸부림'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일 터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선 자신의 삶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들은 설명을 듣지 못한 세대이다. 왜 해야하는지에 대해 듣지 못하고 경쟁적으로 지내오다보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알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을 설명해주어야 한다. 정죄 없이, 가감 없이, 한계 없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해주어야 한다. 정답이 아니어도 좋다. 어떻게 설명할까? 붙들어놓고 일방적으로 하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이든 묻도록, 무엇이든 말하도록 시간과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다음으로 보다 본질적이고, 근본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과 안전의 공포로부터의 자유함'이다. 이들에게 '사랑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 그 동기는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그 존재는 인간과 세상을 피조한 조물주라는 것. 이들에게 '복음'을 들려주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사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자란 세대일 수 있다. 이들의 주일학교 시절은 교회의 세속화로 인해 성경과 교리, 구원에 대한 내용 보다는 흥미위주의 프로그램과 교회성장과 연동된 전도행사가 주를 이뤘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은 언제든지 뒤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실제로 대학시절까지 열심히 청년부 활동을 한 이들에게서 복음의 부재를 확인한 경험이 적지 않다. 사실 복음은 어떤 세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겠으나,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헌신과 제자도의 당위성 보다는 생존이 아닌 보다 숭고한 가치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가슴 따뜻하고 생애적인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것을 경험케 해주는 것이 기성 세대의 책임이며, 속죄일 것이다.
황정현목사(제자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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